생명의 나무,긴 기다림 끝에 부디 날 위안해주길.

2011. 10. 28. 23:38하루의로맨스가영원이된날들


1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더디다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개봉 날짜가 이렇게 반갑고 기쁠 수 없다.
좋아하는 브래드피트와 숀펜을 볼 수 있는 것도 설레었지만, 작년 이맘때쯤 자주 둘러보던 해외 블로그에서
영화 제목과 짤막한 몇 줄에 글귀에 이. 거. 슨. 내게 꼭 필요한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예감과 동시에 그렇게 그렇게
조용히 꼬박 1년여를 기다렸다. 누군가에게도 상당히 묻기 어려운 질문인 '왜'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스스로에게 묻는 내게 있어선 단연 끌릴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윤리와 가정사, 심연으로 빠져들 것 같은 내레이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내적 고통과 슬픔,
파편 난 기억들을 끼워 맞춰줄 것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와 영상들, 끝이 없는 클래식 거장들의 심포니에 향연.
보고 잇는 장면을 생각만 해도 코 끝이 시큰거린다.

모두, 모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늘 행복을 추구하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길 기도하고 기원하며 살아간다.
나 역시도 많은 생각과 다양한 경험과 일상 속에서도 늘 그것을 기원하며 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나름에 슬픔과 고통들이 찾아오지만 그때그때 희망과 사랑으로 잘 극복하며 살아간다.
간혹 그러지 못해 안타까운 생명들도 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생각하던 것 중에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대중적이고도 포괄적인 기준이라는 선에서 나는 과연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잘 살고 있는 건지, 못 살고 있는 건지를 구분할 수가 없어 힘들어 했었다.
그래서 자문을 얻어 돌아온 말은 스스로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었다.
아, 그래서 모두 자신들의 잣대에 맞춰 그것과 다르면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거구나
그래서 힘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우월해지는 약육강식 피라미드 시스템 속에서 나도 한 잣대 거들면서 살아야 하는구나.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 그 많은 타인의 기준에 맞추자면 어느 순간 흔히 말하는 루저가 되는 건 십상일 테고
내 잣대에 의존해 꿋꿋하게 살자면 또 어느 순간 세상엔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무법자가 될 것 같고.
결과는 이도 저도 안되니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들려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집불통으로 지내왔었다
왜냐면 그땐 스스로의 잣대를 내세우기엔 너무 약했고, 타인의 잣대에 서기엔 내 스스로를 너무 서글프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1980년에 태어난 나는 겨우 세상을 5년 정도 살았을 무렵 가족의 사고와 아픔, 이별, 오랜 안식처 없는 방랑과 기다림을 맞이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제일 처음으로 접하는 세상은 사랑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세상이다.
순백색에 스펀지 생명은 그 세상 안에 것들을 모두 흡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채 3년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인간 본성은 이때 만들어진 성격을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누가 도대체 한두 살 때를 기억할 수 있을지..

극복.
사전을 찾아보면 지옥 같은 악조건, 고 생 따위를 이겨내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어떠한 상황이나 악조건도 이겨내면 완료? 나와 나 사이에도 매번 싸우고 이기고 지고.
그래서 이겨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재처 두면 안 되는 것을 몇 해 전부터 알게 됐다.

내가 나에게 치유와 그리고 위안
안 좋고, 슬프고, 아픈, 무서운 기억들은 계속 모두 잊으려고만 했다. 잊으려 하면 잊힐 수도 있을 테니까.
한데 불현듯 치유도 안되고 방치되 잇던 기억과 감정들이 떠오르면 더 많이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극복만은 안전함도 완전함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그냥 그때를 넘기는 견딤이었다.
드러내지 않고 꾸역꾸역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살을 갉아먹으며 욕창처럼 번지는 염증 속으로 가두는지를 알고 난 뒤
그러는 나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힘들어했을지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조금씩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를 위안하고 안아주며 지낸다.

사랑.
인간은 수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단어로 표기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기쁨, 슬픔, 희열, 분노..
모두 단적으로 한 가지의 감정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들이지만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그 뜻을 헤아려 정확하게 표현하려 해도 상대가 그것을 인지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린다.
어른들은 종종 그런 표현을 하셨다.

제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잇겠냐며 허허 웃으며 그 뒷말을 잇지 않으실 때,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균등한 사랑을 주고 있다는 표현을 하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 그 말이 어쩜 사랑이라는 말에 참뜻을 갖고 있는 거겠고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 외엔 누구나 제 몸을 깨물면 안 아픈 사람은 없다.
한국말 중엔 내 한 몸 불살라라는 말이 있다. 제 몸을 태워 온기와 밝은 빛을 주는 심지처럼
스스로를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 고통 속에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자신을 끝없이 바라봐 주는 것에 도리어 감사해 하며 웃음 짓게 해 더 끝까지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하는 그런 무한한 감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감정을 알게 되면 바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죽어서도 그리울 것 같다는 말을 하는가 보다.

꼭 희생만이 사랑이 아니라고도 하지만 아니, 아니다. 누군가를 또 무언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긴다면
10원짜리 껌이라도 사서 쥐여주고 싶어지는 그런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그 작은 것도 희생이라면 희생일 수 있으니까.
태어나면서 옷 한자락도 제 것 없이 가진 것은 맨몸 하나에서 손에 든 것을 반으로 나눠 주는 것도 모자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나눠 주겠다고 헌신하니 그 작은 것도 많은 것을 미화시키는 희생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무(無)라고 생각한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있는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두 없어지기 전에 알았으면 하니까.

영화 하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긴 길었나 보다. 보기도 전에 무슨 생각이 이렇게 많았나 싶게
두서 없이 뭘 이렇게 적어 내려놓은 건지.
이렇게 글을 쓰는 것 또한 나를 위안하는 방법 중 하나고, 블로그도 나의 안식처다.
하루하루 나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도록 사랑하고 싶어서다.

부디 이 영화도 날 위안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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