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 지저귈 때면

2011. 9. 11. 01:31하루의로맨스가영원이된날들


언젠가 어느 날 누구는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했을 때

나는 동시에 그것을 나 또한 무척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서로를 모르던 각자의 시간 속에서 내가 호퍼의 그림들을 봤을 땐

초상화와 풍경화 속엔 항상 창문이 있었고,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비치는 곳은 매우 고요하고 정적이 흐르는

그 자체는 모두 정지하고 있으나 빛의 흐름에 그것은 마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로운 기분을 자극하는 정물화를 보는 듯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작가의 의도에 알맞게 그것 들을 바라보며 십대의 끝마무리, 스무 살 초반의 젊은 날

출구 없는 수많은 밤들을 그들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동질감으로 절대의 시간을 갖게 했던

나만의 고독함에 한 일부분이었기에 당시에 그 기분을 함께 느낀다면 매우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일 때의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르다. 외로움은 타인 속에서 나를 보는 감정이며,

고독은 철저히 나를 돌보는 일이기에 그것은 나를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생각하며, 드러내어 위안할 수도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함께이면서도 고독하다는 것 또한 누구나 갖고 있지만 그것은 드러낼수록 끔찍할 뿐이다.

그래서 당시 나는 그것을 동시에 함께 느낄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은 결코 어둡거나 귀를 닫은 배타적 공간은 아니지만,

주머니 속에 히든카드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꺼낼 수도 없고,

불현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밤이 찾아오듯 그렇게 소리 없이 혼자만의 절대적 시간에 찾아 오기 때문이다.


외롭고 우울해 보였지만, 착각이었을 것 같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 때문에 타인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분명 착각이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구나 자기애, 자기 연민을 갖고 있지만

어느 한 부류에겐 고독이라는 것은 자기애에 빠져 자기 연민이 통상 능력과 유관하며,

자신에 하나의 생존 기법이라 하여 자기가 자신을 긍휼히 여기다 심리적 치유와 방어 기능까지 동반해

비루하느니 차라리 비극적이면, 조소나 힐난 대신 동정과 연민을 얻을 테고, 거기에 희생자는 자신이기에

비난할 권리, 오로지 자신에게만 귀속될 테니. 이 얼마나 안전하기 짝이 없는 자기가 주인공인 비극 한편을 쓰는

나르시시즘에 치달은 그 누구의 비탄은 스타일이며 그 누구의 고독은 패션이라

그렇게 섬세하게 찌질한 필살기일 뿐이라는 것을..

 

간혹, 어느 누구들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간들이 있겠지.